교육·연구
번호 34
제목 증언은 가능한가? (발제문)
2017. 11. 23. 17:21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하라 타미키(原民喜), 「여름의 꽃(夏の花)」을 통해서

오가타 요시히로(緒方義広)

■ 하라 타미키(原民喜)
→ 별도 서경식 선생님 자료를 참조.

 

 
 ■ 「여름의 꽃(夏の花)」

『미타문학(三田文學)』(1947년 6월호)에서 처음으로 발표한 단편작품.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 날의 아침부터 그 다음날까지 그가 직접 경험한 것의 기록.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그는 마침 화장실에 들어가 있어서 즉사를 면하였다. 비난하려고 강가 쪽으로 가면서 “이 일을 글로 남겨 놓아야 한다”고 직감했으나 그때 그는 원폭 피해의 전체를 아직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여동생과 형들, 그리고 그 가족들 등과 같이 비난하면서 원폭 피해의 비참한 실태를 보게 된다. 한 폭탄에 의해 “마치 마술”과 같이 순간적으로 폐허의 도시로 바뀐 그곳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다른 마을까지 비난하였는데 거기에 가는 도중에 본 것은 ‘지옥’ 같은 원폭피해의 광경이었다.

“훨훨 화염에 휩싸인 불같이 뜨거운 하늘 아래, 앞을 가로막고 선 은빛 허무의 확장 속에 길이 있고, 강이 흐르고, 다리가 있었다. 그리고 벌겋게 익어 부풀어 오른 시체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정밀하고 정교한 방법으로 실현된 새로운 지옥이며, 여기서는 모든 인간적인 것은 말살당하니, 비우컨대 시체의 표정을 한 곳에서, 뭔가 모형 같은 기계적인 것으로 치환되고 있는 젓이었다.”(본문에서 발췌)
 
 

 
 ■ 원폭피해란?

1. 히로시마(広島):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 B29폭격기 ‘에노라 게이(Enola Gay)’가 우라늄형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을 히로시마시에 투하하여, 나카(中)구 시마(島)병원 상공 약 600m에서 작력했다. 1945년 12월말 시점에 13~15만 명의 시민들이 사망했고 현재까지 약 20만 명이 원폭이 원인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 외에 건물 약 48,000호가 전괴 및 전소했다.(1946년 8월 히로시마시 조사)

2. 나가사키(長崎):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지 3일 만인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떨어졌다. 미군은 제1 목표로 코쿠라(小倉), 제2 목표로 나가사키를 각각 설정하여 B29폭격기 ‘박스 카(Box Car)’가 출발했다. 애초의 목표인 코쿠라 상공을 지날 때, 전날의 야하타(八幡) 폭격으로 연기와 안개가 심했기 때문에 원폭 투하를 포기하고 제2 목표인 나가사키를 향해, 같은 날 오전 11시 2분, 원폭을 투하했다. 나가사키의 원폭으로 인한 사망자는 당시에 약 7만 명, 현재까지 14만 명에 달한다.
 
 

 
 3. 원폭 피해의 3가지의 유형:

(1) 열선의 피해: 원폭 폭발로 방사된 강렬한 열선은 폭발 중심지로부터 3.5km 지역까지의 사람들에게 심한 화상을 주었다. 특히 중심지로부터 1.2km 이내 지역에서 막을 장해물이 없이 열선을 직접 받은 사람들은 피부가 타고 체내 조직 및 장기에 치명적 데미지를 받았기 때문에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즉사, 아니면 며칠 내에 사망했다.
 
 

 
 (2) 폭풍의 피해: 폭풍은 폭발 중심지로부터 500m 지점에서 1m사방의 19t(자동차 약 15대의 무개)이라는 거대한 힘이었다. 이것으로 인해 건물들은 거의 다 푸셔지고 사람들은 날려지거나, 폭풍의 압력으로 내장이나 눈이 체외로 떠져나가거나, 깨진 유리편이 온몸에 박혀지거나 또한 건물 밑에 깔려 사망했다.

(3) 방사선의 피해: 히로시마에는 원폭 폭발 1분 이내에 대량의 ‘초기방사선’이 내리쏟아졌는데 이것이 인체에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특히 폭발 중심지로부터 1km 이내에서 직접방사선을 받은 사람들은 거의 다 사망했다. 또 이후에는 ‘잔류방사선’이 있었기 때문에 직접 피폭 안한 사람들도 구원 및 구호활동, 친척 등을 찾으러 폭발 중심지 근처까지 갔다가 방사선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병에 걸려 사망할 경우도 있었다.
 
 

 
4. 원폭증: 원폭이 인체에 남긴 장해는 시간이 경과되어도 치유되지 않으며, 특히 반사선의 공포는 상당했다. 점령기 일본의 원폭증 연구는 제한되어있었기 때문에 일본 독립 후에 후유장해의 실태가 조금씩 알려졌다. 원폭투하 당시 어머니의 태내에서 방사선을 맞은 태아들 중에는 장해를 짊어지고 태어날 경우도 있었다. 바로 피폭 2세라고 불리는 피해자들이다.

5. ‘세계 유일한 피폭국, 일본’?: 전시에 핵무기의 피해를 받은 국가는 ‘일본’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 이 ‘일본’ 속에는 일본인이 아닌 피해자들이 많이 있었다. 국가총동원체제라고 해서 당시 식민지화시키던 조선과 타이완에서 강제연행 등으로 인해 일본에 와있던 많은 사람들도 원폭의 피해를 입었다. 원폭피해자 중에는 또한 중국, 동남아시아의 나라들, 그리고 나중에 북남미로 이주한 사람들까지 포함되어있다. 또 원폭실험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전시 외의 피폭자들까지 있다.

6. 원폭투하를 실행한 자의 증언: 스미소니언협회(Smithsonian Institution)가 운영하는 국립미국역사박물관(The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의 ‘에노라 게이’ 전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 있어서... “우리에게 전쟁을 가져온 그 군대(일본군 *옮김이)가 악이라는 것에 누가 의문을 제시할 수 있는가? 종복의 이름 하에 인류에 대해서 행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만한 야망행위로 유죄인 적을 일본의 도시 상공에서 계속된 B29(폭격기 *옮김이)의 무정한 공폭작전으로 선례 없는 파괴가 가져온 후에도 강복할 것을 거부한 적에 우리의 행위야 말로 이겨냈음을 누가 의문할 수 있으리라?”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 속에 살았던 자는 그 사실을 보존하여 보고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Charles W. Sweeney, 『私はヒロシマ、ナガサキに原爆を投下した』로부터)


■ 문제제기



1. 원자폭탄의 투하란 일본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원폭 피해’로만 보고 있으나,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종료시켜주었던 효과적인 작전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과연 어느 입장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옳은 입장이란 없을 것인가?



2. 내가 만난 한국의 한 평화활동가가 말했던 “우리가 원폭의 문제에 관해서 일본에 계신 분들과 함께 고통을 느끼고 고민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게, 먼저 일본 분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해주세요”라는 주지의 말이 있다. 이 말은 그 당시의 나에게 감동적으로 들렸다. 이 메시지를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 때와 다른 느낌이 들을 수도 있겠다 싶다.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떤가?



3. 피폭 2세 피해자들이 생존하지만 원폭피해 생존자들은 고령이고 전쟁이 끝난 지가 62년이 지나려고 한다. 앞으로 생존자들의 목소리와 비참한 피해 현실을 직접 느끼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과연 원폭피해의 실태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인가? 기억할 필요는 없는가?



4. 흔히 말하는 청중의 ‘응답책임’이란 무엇인가?





■ 주요 참고문헌

佐伯彰一･松本健一(監修). 『原民喜 ─夏の花/心願の国(作家の自伝71)』. 東京: 日本図書センター, 1998.

HIROSHIMA PEACE SITE/ 広島平和記念資料館 WEB SITE

(http://www.pcf.city.hiroshima.jp/ 2007.5.22 검색)

チャールズ･Ｗ･スウィニー(Charles W. Sweeney, 黒田剛譯), 『私はヒロシマ、ナガサキに原爆を投下した』. 東京: 原書房,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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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읽고

서혜영


내딛지 않으면 안 되는 첫발

언제나 나를 이끈 것은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세계대전…… 그 무자비했던 20세기 역사에 내몰리고, 고향이나 가족과 강제로 헤어져야 했으며, 뿌리째 삶을 강탈당했던 죽은 자들의 묘다. 온갖 무덤 앞에서 나는 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을까 하고 귀를 기울여 본다. 그러나 사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덤은 아무 말이 없다.
-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 21쪽, 서경식
죽은 자와 논쟁하는 것은 서먹한 일이며 그다지 성실한 일도 아니다. 하물며 그 부재자가 친구가 되었을지 모르는 인물이며 가장 가치 있는 대화 상대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내딛지 않으면 안 될 첫발일 수 있다.
- 《익사한 자와 구제된 자》 프리모 레비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 157쪽에서 재인용

1996년 1월, 한 재일 조선인이 낯선 풍경 앞에 서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행운의 7000명’ 가운데 한 사람. 성실한 ‘증인’으로서의 임무를 신앙처럼 여기며 그 이후의 시간들을 살았던 사람.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지 4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던진 사람. 프리모 레비의 무덤을 찾아 가는 길이다.

장 아메리가 죽고 프리모 레비가 그러했듯이, 서경식 역시 레비와, 아니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레비의 죽음과 대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서경식은 내내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레비, 당신은 왜 그토록 갑자기 죽어버렸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레비의 무덤 앞에 섰지만 그이의 무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경식은 집요하게 죽은 자들의 깊고 긴 침묵의 이면을 재구성한다.

이 책은 그이가 레비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치밀하게 엮어낸 그물이다. 서경식은 마치 영매가 된 것처럼 레비가 생전에 썼던 글들을, 장 아메리를, 한나 아렌트를, 츠베탕 토토로프를, 서경식 자신의 어린 시절과 형들의 기록을 불러들여 그 죽음의 메시지를 추적한다.



왜 서경식은 프리모 레비의 죽음에 매달리는가

나는 항상 ‘의식적인 피차별자’로 살아갈 것을 나 자신에게 요구해 왔다.
- 《디아스포라 기행》 서경식, 51쪽
“레비가 1987년에 자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단순 명쾌했을 것이다.”
불가리아 출신의 지식인 츠베탕 토도로프는 그렇게 쓰고 있다. 이 말에 이끌리듯 나는 이 여행을 떠나 온 것이다. 그의 말이 다시금 아려오는 듯한 오래된 충치의 아픔처럼 나의 가슴에 사무쳐 왔다.
-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 150쪽, 서경식
인생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레비에 의해서 긍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인생을 긍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금 뭔가를 고뇌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그런 그가 우리를 두고 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 180쪽, 서경식

일본에서 이탈리아까지, 멀리 지구별 반대쪽까지 날아가 서경식이 레비의 죽음과 마주선 까닭은 무엇일까. 그이를 거기까지 부른 것은, 영매 역할을 자처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다시 질문해 보자. 영매는 누구인가. 숱한 고난을 겪은 사람만이 될 수 있는 존재다. 그 고난이 온 몸과 영혼에 새겨져야만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제 것처럼 앓고 제 것처럼 짊어지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해 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서경식과 프리모 레비는 닮아 있다. 둘은 박해받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한다. 가장 ‘옳은 자가 타인이 저지른 죄 앞에서 느끼는 치욕감’ 즉, ‘수치’의 감각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는 것, 외려 점점 강화시켜 가는 모습까지도 비슷하다. 디아스포라로서 자신의 고난에 대해 각성한 사람. 입술을 태우는 듯한 고통에도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 결코 사라지지 않는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집요하게 그 불안의 근원을 물었던 사람. 서경식이 어느 책에선가 자신은 '30대 초부터 프리모 레비에게 매혹되어 그의 사색으로부터 상당한 양분을 흡수해왔다.’고 고백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서경식은 레비의 글을 읽으며 자신이 ‘예외적인 존재’도 ‘혼자’도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받았을지 모른다. ‘뱃길 안내원’ 혹은 ‘나침반’에 의지하듯이 서경식은 레비를 의지했을 것이다.

발제를 준비하며 나는 이 두 사람의 ‘집요함’에 대해 생각했다. 마치 이것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길이 없는 사람들의 필사적인 발버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구도, 무엇도 대신 해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존재를 증명해 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물론 흥미로운 차이들도 보인다.

서경식은 재일조선인이다. 그이는 식민국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백성의 후손이다. 태어나 조금씩 말을 배우면서부터 자신이 식민국의 백성과 다르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식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일본사회의 ‘불순물’로 ‘취급’된 사람. 결국 그 자극에 대항해 자기 존재의 근거를 세워야만 했던 사람. 그래서 배제의 기억이 세포 하나 하나에 새겨져 있는 사람. 모어와 모국어가 다른 사람. 문학을 전공했지만 법학교수가 된 사람.(나는 늘 이 이력이 늘 궁금했다. 왜, 왜일까? 시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 산문적 합리성을 획득하기 위해 애쓴 것은 왜일까? 두 번의 강의를 들으며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서경식이다.

레비는 달랐다. 그이는 이탈리아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라는 보편성 앞에서는 ‘유대인’이라는 것은 ‘주근깨’ 정도의 차이라고 믿으며 자란 아이였다. 대학에 들어가고 이탈리아에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자 ‘인종법’에 근거한 유대인 배격정책이 힘을 얻으면서 레비는 서서히 유대인이 되어갔다. ‘이른바 반유대주의라는 '촉매’가 일으킨 화학 반응에 의해’ 레비는 ‘이탈리아 사회라는 유기체에서 ‘불순물’로 추출되어’ 간 것이다. ‘태생의 머나먼 기억’이 뒤늦게 덮쳐와 존재를 완전히 규정해 버린 것이다. 모어와 모국어가 다르지 않았던 사람. 배제가 절멸로 이어진다는 것을 온몸으로 확인한 사람. 화학을 전공했지만 작가가 된 사람. 프리모 레비이다.

두 사람은 모두 배제의 기억에서 비롯한 불안과 초조, 몇 겹으로 싸인 수치의 감각을 공유하지만 그 결말이 어디로 이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전망을 가진 것 같다. 레비는 배제가 절멸로 이어진다는 것을 온몸으로 확인한 뒤부터 죽는 순간까지 잠시도 안도한 적이 없었다면 서경식은 아우슈비츠 이후 레비의 삶을 지켜보며 어느 순간 조금쯤은 안도했던 것 아닐까.

레비의 자살을 접하고 서경식은 그 안도감의 크기만큼 당혹스럽고 힘들었을 것이다. 서경식은 레비의 글을 읽으며 자신이 ‘예외적인 존재’도 ‘혼자’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았지만, 레비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 위로 받은 것이 아니라 서서히 더 큰 불안에 질식당했다는 것, 결국 그 무거운 절망을 등 뒤에 지고 나선형 계단 아래 텅 빈 공간으로 몸을 던졌다는 것, 그 소식을 접한 충격이란 어땠을까. 그것은 내가 섣불리 가늠할 수 없는 폭일 것이다.

어찌되었든 레비가 죽고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서경식은 기어이 레비의 묘 앞에 섰다. 그가 얼마나 그 죽음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얼마나 절실하게 레비의 죽음이 주는 메시지를 해독하고 싶어 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레비, 당신은 왜 그토록 갑자기 죽어버렸습니까?

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려야 했을까?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가해자의 수치까지도 피해자가 고스란히 받아서 시달려야 하는, 이 부조리한 전도가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 그들은 자신들은 ‘유대인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에 희생된 까닭에 그 사상을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대치해야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도 물론 ‘인간에서 예외는 아니다. 한번 파괴된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려고 하는 한, ‘인간’이 저지른 죄는 어김없이 그들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 181~182쪽, 서경식
공포나 잔혹함의 연쇄는 끝없이 순환하며 확대되어간다. “인류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레비)의 불안과 초초는 마지막까지 멈추지 않았다.
-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 256쪽, 서경식
프리모 레비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명쾌했을 것이다. 고난에 대한 인간성의 승리나 구제의 서사, 오디세우스의 개선에 관한 서사…… 우리는 대부분 스스로의 천박함과 나약함 때문에 그 단순 명쾌함에 매달리려고 한다. 하지만 옅은 어둠 속 공간에 몸을 던진 프리모 레비는 자기 자신의 육체를 돌바닥에 내동댕이침으로써 우리의 천박함을 산산이 깨부수었다.
-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 271쪽, 서경식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포로들을 두 부류로 나누면서 자신처럼 ‘정치적 경험이 있거나 종교적 신념 또는 강한 도덕성을 소유’한 ‘귀환자들에게는 기억하는 것이 의무’였다고 밝힌다. 그들자신도 ‘잊고 싶어하지 않’을 뿐 아니라 ‘특히 세상이 잊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 경험에 의미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수용소는 사고가 아니라는 걸, 단순히 예기치 못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외따옴표 부분은 모두 《이것이 인간인가》 부록으로 실린 ‘독자들에게 답한다’에서 발췌한 것이다.

실제로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를 통해 아우슈비츠에 대한 증언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새로운 죄목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 정신의 몇몇 측면에 대한 조용한 연구에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 심판하고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이가 파헤치는 수용소(라겔)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루에도 몇천 명의 사람들을 싣고 와서 선별하고 학살하고 소각하던 정교한 시스템’이 가동될 수 있었던 것은 극악한 나치 정권이 ‘노동을 통한 유대인 절멸’에 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집행하면서부터가 아니다. 역사학자 라울 힐버그가 지적하듯이 ‘나치 지배 12년간 일어난 일 중 대부분은 이미 과거에 발생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나치의 절멸 행위는 진공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순환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의 정점에 있는 것이다.’

결국 아우슈비츠는 인간성 상실의 가장 극명한 사례이자 증거인 것이지 그 시작점은 아니다. 근대 유럽이 지향하고 도달하고자 애쓴 문명 안에 내재화 되어 었었지만 유럽 밖으로 향하며 그 모습을 감춰온 야만이 내부로 얼굴을 돌린 것이다.

레비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것, ‘이것이 인간인가?’ 하고.

‘나는, 당신은, 우리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라겔에서 살아 돌아온 레비는 우리 인간성의 위기에 대해 고통스럽게 물었다. 최선을 다해 저편을 이해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인생에서 목적을 가지는 것은 죽음에 대한 최선의 방어’라고까지 말하면서 증언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했던 레비는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차곡차곡 달구어진 용암이 어느날 갑자기 솟구치듯이. 그는 ‘저편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다시 ‘척도를 만들고’ 아우슈비츠 이후의 일을 함께 생각하고자 했지만 소통은 실패했다.

우리는 레비의 증언을 두고 ‘그런데도 어떻게 인간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우리 자신에게 되묻는 대신에, 다만 레비의 증언을 통해 아우슈비츠를 겪고도 인간이 살아 갈 수 있다는 것, ‘이만한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그 확인은 어느 순간 우리의 집단 면죄부가 되었다. ‘괜찮아, 그래 괜찮은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결국 우리의 무심함, 혹은 그 무심함을 넘어선 뻔뻔함이 그이의 불안과 초조를 계속 키웠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레비를 죽인 것은 그런 나, 그리고 당신, 우리이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때때로 우리도 던진다. 하지만 언제나 그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 ‘나’는 빠져 있다. 어쩌면 나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오!’라고 말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그 책임으로부터 슬쩍 빠지려는 ‘뮐러’의 다른 얼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비는 단 한순간도 그 ‘인간’의 범주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그 인간성을 복원하는 것이 ‘저편’이 아니라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너무나 무겁게 인식했다.

그런데 모두가 카인임을 인정해야 할 때임에도, 사람들은 외면하거나, 용케 살아남은 아벨-그 아벨은 되려 자신이 라겔에서 죽어간 아벨을 대신해 살고 있는 카인이라고 생각했다-의 증언을 소비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섣불리 안도하거나, 팔짱을 낀 채 싸늘하게 품평하거나, 뮐러처럼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만 들이대면서 슬쩍 한 발을 빼거나, 용서해야 할 주체도 아니면서 죄인을 멋대로 사면했다. 레비는 ‘마음이 갈갈 갈기 찢’겼을 것이다. 우리가 ‘의도적인 태만’과 ‘자신은 공범이 아니라는 환상’으로 무장한 채 레비의 증언을 외면하거나 편할 대로 전유하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레비를 죽여간 셈이다. 레비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적당히 치고 빠지는 지점을 예민하게 감지해 낸 것이다.

결국 레비의 자살은, 그가 남긴 수많은 증언과 고백보다 더 큰 20세기에 대한 절망이고, 고발이다. 영원한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는 숱한 아우슈비츠 희생자들처럼, 레비도 그 길을 택했다. ‘모든 존재 증명을 부정당한 그에게 스스로 죽음의 주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최후의, 또 가장 확실한 존재 증명이었던 것이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연대를, 인간다운 말을, 조언을, 그저 얘기를 들어줄 귀를, 그런 요구는 항상 어디서나 있었지만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누구나가 그 형제들에게 카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웃을 장소를 빼앗아 그를 대신해서 살고 있다.
- 《익사한 자와 구제된 자》 프리모 레비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 177~178쪽에서 재인용

우리는 레비의 죽음을 통해 깨우쳐야 한다.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와의 연관성을 설정하지 못한다면 모든 의미 있는 경험과 증언, 고발은 한낱 구경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유럽 중심의 근대가 세계를 장악한 지금, 지금은 아메리가 그랬듯이 ‘동물적인 반응’이 아니라 ‘왜곡된 세계에 관해 숙고한 뒤에 나온 반역’이 필요한 시대일지 모른다.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라는 것, 끊임없이 의심해야 할 때라는 것, 카인이 아니면서도 카인의 멍에를 스스로 쓰고 증언자의 역할을 자임하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할 때라는 것. 레비의 그 전언을 깊이 새겨야 한다. 그리고 서경식이 프리모 레비라는 거울 앞에 서서 끊임없이 자신을 비추어 보고, 대화를 시도하듯이 우리도 그래야 한다. 나는 인간인가. 지금 이 순간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끝까지 물어야 한다. 고통스럽더라도 눈을 감지 않는 것, ‘저편’에 대한 상상력은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부끄러움과 욕됨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는 것, 그런 노력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웃의 장소를 빼앗아 그를 대신해서 살고 있’는 자들이 져야 할 의무이자 책임이다.


절망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19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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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18-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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